GamulGamul · Prologue
빛을 막지 않고 거르는 것 — 오래된 창이 하던 일을, 이 시계가 합니다.
KC 인증(적합등록): R-R-SotG-GAMUL30
가물가물
기억이나 빛이 또렷하지 않고, 은은하게 떠오르는 상태를 이르는 말.
시간의 감각
바쁜 일상 속 시간은 어느 순간 문득 흘러가 있습니다.
'가물가물'은 그렇게 희미하게 남는 순간들의 감각입니다.
빛과 공간
창호지를 통과한 빛은 강하지 않고 은은하게 퍼집니다.
오브제의 빛도 또렷하기보다
'가물가물'하게 번지며 한국적인 미감을 전달합니다.
"가물가물" — 또렷하지 않아 더 오래 남는, 빛과 시간의 기억.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화면과 표시등은 대체로 또렷하고 차갑습니다. 필요한 것을 정확히 알려주지만, 그 빛 앞에서 방은 좀처럼 쉬지 못합니다. 잠들기 전 어둠 속에서도, 숫자는 홀로 선명하게 떠 있습니다. 시간을 알려주는 일이 꼭 이렇게 눈을 찌르는 방식이어야 할까, 생각했습니다.
한옥의 창은 달랐습니다. 빛을 밀어내지도, 다 들이지도 않고 한지 한 장으로 걸렀습니다. 그렇게 걸러진 빛은 방을 밝히는 대신, 방에 조용히 스몄습니다. 안과 밖을 가르는 벽이 아니라, 둘을 부드럽게 이어 주는 경계였습니다. 우리가 옮기고 싶었던 건 창호의 모양이 아니라, 그 빛의 태도였습니다.
격자의 결은 한옥 창호의 완자살에서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숫자는 이 창 너머에서 떠오르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종이 뒤로 가라앉습니다. 창밖 풍경이 그러하듯, 시간도 요란하지 않게 흘러갑니다. 시간을 확인하는 일이, 벽에 난 작은 창을 잠깐 들여다보는 일에 가까워집니다.
이 빛은 환한 곳에서는 조용히 물러나 있습니다. 주위가 어두워질수록, 종이 안쪽의 빛이 비로소 또렷해집니다. 스스로를 내세우기보다, 어둠이 내린 뒤에야 가만히 곁을 밝힙니다. 그래서 하루가 저무는 시간에, 가장 부드럽게 켜져 있습니다.
종이를 지난 빛이 눈에 편안하게 닿기까지, 오래 헤맸습니다. 너무 밝으면 방을 눌렀고, 너무 여리면 시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빛의 밝기와 종이의 두께, 살의 간격을 조금씩 바꿔 가며 그 사이 어딘가의 균형을 찾았습니다. 눈이 아니라 마음에 닿는 빛은, 그렇게 여러 밤을 지나 겨우 도착했습니다.
이 빛의 결은 기계로 낼 수 없습니다. 결국 빛을 부드럽게 만드는 건, 마지막에 덧입히는 종이 한 장이기 때문입니다. 전통 창호에 쓰이는 닥지를 창호풀로 한 장씩 손으로 붙입니다. 한 점을 완성하기까지 여러 날이 걸리고, 같은 결의 빛은 두 번 나오지 않습니다.
테이블에 세워도, 벽에 걸어도 됩니다. 벽에 걸면 방에 없던 작은 창이 하나 생긴 것 같고, 선반에 두면 곁에서 낮게 빛나는 등이 됩니다. 자리를 옮길 때마다, 그 자리의 저녁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가물가물 창호시계의 첫 이야기는 와디즈에서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지금은 다음 만남을 천천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모든 시계는 여전히 한 점씩, 손으로 완성됩니다.
그때까지, 당신의 방 어느 자리에 이 작은 창을 낼지 미리 떠올려 봐 주세요.